본문 바로가기 대메뉴 바로가기

美來路홍성군 문화관광

해당 콘텐츠와 관련된 유튜브 영상을 바로 보실 수 있습니다.

하단에 콘텐츠는 유튜브에 등록된 관련 영상을 불러와서 제공하고 있습니다.
부적절한 영상은 필터링을 통해 지속적으로 선별 합니다. 문제있는 영상은 신고해주세요!

신고하기

도지정문화재

김좌진장군비

김좌진장군비
  • 문화재명 김좌진장군비
  • 종별 충남 문화재자료
  • 지정일 1984.05.17
  • 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5-3

관련이미지

문화재소개

김좌진(1889~1930) 장군은 홍성에서 태어나 15세에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고, 그들에게 농사지어 먹고 살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갔으며, 1907년 고향에 돌아와 호명학교를 세우고 90여 칸의 자기집을 학교건물로 쓰게 했다. 광복단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하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3.1 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 후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고,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 한다는 레닌 정부의 선언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로 건너 갈 때, 함께 우수리강을 건넜다가 생각한 바 있어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하여 대기하다가,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 사관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력하였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하여 중앙 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 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어 계속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고려 공산당 소속의 박상실(朴尙實)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좌진장군 생가지 옆에 위치하는 김좌진장군비는 항일 운동과 독립 운동에 일생을 바친 그의 치적을 기린 비로서 1949년 대한청년단 홍성군단의 성금으로 건립하였다.

찾아오시는 길

"출처표시"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