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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來路홍성군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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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코스

홍주성 이야기천년의 시간과 마주하는 아홉 번째 이야기 성곽길에서 만난 홍성 사람들

  • 홍화문
  • 김좌진 흉상
  • 한용운 흉상
  • 손곡 이달 시비
  • 성삼문 흉상
홍주성 성벽 이미지1

벽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고작 오 년 남짓한 분식집 벽만 해도 온갖 사사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안에서는 시험이 끝나서 신난다거나 여기는 짬뽕 라면이 최고라고, 밖에서는 어느 커플이 싸우고 헤어졌거나 웬 아저씨가 주말마다 노상방뇨를 해댄다는 알아도 몰라도 그만인 것들을 벽은 알고 있다.

게다가 벽에다 대고, 혹은 어딘가의 벽을 지나며 혼잣말 한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홍주성 천년여행길의 어쩌면 가장 짧은 코스, 하지만 그래서 소중하고 애틋한 성곽길을 걸어본다.

홍화문 이미지1
01홍화문
홍성의 밝은 앞날을 기대하며

홍주성의 성벽 외곽 산책길을 걷자면 남문인 ‘홍화문‘ 눈에 띈다.

남문은 홍성 고지도에는 기록되지 않았었는데 홍주성 발굴 작업 중 그 흔적을 찾게 되어 2013년 복원하게 된 깜짝 선물과 같은 문이다.

홍화문 관광 안내 이미지
홍화문 현판 이미지

홍화문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서예가 장강 변수길 선생이 현판의 글씨를 썼다.

이 홍화문은 홍주 주민들에게는 또 다른 경치 좋은 산책로가 되어 큰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 홍화문 이미지2
  • 홍주성 성벽 이미지2

홍주성에서 위로 올라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문루는 이 홍화문뿐이기 때문이다.

높은 빌딩이 앞을 가로막지 않아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며 사색을 즐기기에 좋다.

성곽은 높이 14m에 길이 810m. 원래 길이는 17.772km로 상당히 길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홍주성이니만큼 숱한 고난의 세월을 견디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이 800여 m뿐이다.

홍주성 성벽 이미지3

일제 강점기 때 홍주성을 다 부숴버리려는 일본인들에 강하게 반발하여 그나마 조금 남은 것. 그마저도 1978년 홍성 지진으로 많이 무너져버렸다.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홍성 주민들의 관심으로 아직 보수공사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홍주성 성벽 이미지4

성곽을 바라보며 길을 걷다 보면 그것을 이루는 돌들이 알려주는 것들이 있다.

유심히 보면 어느 돌에 선명하게 글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흥’이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예산군 대흥면을 말한다.

성벽을 쌓는 공사는 철저한 책임제로 이루어졌다. 바로 대흥 사람이 다음에 표시된 돌까지 쌓았다는 것으로 그 사람이 그 작업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홍주성 성벽 이미지5

또한, 서로 다른 크기의 돌들이 성곽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초기 숭유억불정책으로 전국의 수많은 절이 사라지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홍주의 광경사였다.

절을 부수고 그 사찰부재로 성벽을 만든 것이다. 현재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바로 그곳이 광경사가 있던 곳이다.

그 증거로 작년 홍주성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광경사 석탑 부재가 대거 출토되기도 하였다.

  • 홍주성 성벽 이미지6
  • 홍주성 성벽 이미지7

언제나 종교가 정치적인 목적의 이용수단이나 희생양이었던 역사의 순간들을 생각하면 씁쓸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세상 섭리 같은 건가 싶기도 하여 안타깝다.

만해 한용운 흉상 이미지1
성곽길 동상_최영,성삼문,한용운,김좌진 / 홍성의 자랑스러운 인물

성곽길 중간중간 낯익은 얼굴들을 만나게 된다. 최영, 성삼문, 한용운, 김좌진의 흉상이다. 이들은 홍성의 자랑, 이곳에서 태어난 홍성 사람들이다.

성벽과 수구, 최영과 성삼문 관광 안내판 이미지1

최영 장군은 부친 최원직으로부터 ‘너는 마땅히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지키고 살아온 굳은 신념을 지니고 청렴하게 살아온 고려의 충신이었다.

최영 장군 흉상 이미지

그는 전장에 나갔다 하면 당연하게 적을 격퇴하여 명성은 하늘을 찔렀으나 그의 청렴함으로 집은 식량도 모자랄 정도로 빈곤하였다고 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그의 강한 충심은 여전히 이 땅에서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성벽과 수구, 최영과 성삼문 관광 안내판상 이미지2

사육신 중 한 사람으로 단종복귀운동의 실패로 세상을 떠난 성삼문은 앞의 최영 장군과 같은 집에서 102년 후 태어났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과 조선 초기의 충신이 한집에서 태어나다니 그것도 그들의 충심으로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됐다는 점에서 이 집터가 정한 운명을 생각해 보게 하기도 한다.

조선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집현전의 학자로 세종과 함께 한글 창제에 이바지하였으나 계유정난으로 왕권을 가로챈 받아들일 수 없어 그의 집안은 멸족하게 되었다.

성삼문 작명유래에 관한 벽화 이미지

그는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낳았느냐?’라는 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고 하여 ‘삼문‘이라 지어졌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 흉상 이미지2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은 일제 강점기의 시인이자 승려이다. 3·1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조선총독부와 반대방향인 북향으로 집을 짓고 식량 배급도 거부하였다.

친일로 변절한 최남신이 탑골공원에서 인사하자 차갑게 무시했으며 3·1운동 때 체포된 뒤 고문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걱정하는 민족대표자들을 보고 화장실 인분을 퍼다가 머리에 끼얹기도 하였다.

한용운의 시 복종이 새겨진 비석 이미지

만해는 고도의 은유법으로 총독부의 검열을 교묘히 피하며 민족정신이 강한 저항시를 썼을 뿐 아니라 문맹률이 높던 당시의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경전을 일반인들이 읽기 어려운 것을 깨닫고 대장경과 화엄경 등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였다.

그는 일제의 탄압에 끝까지 저항하며 독립정신을 지키며 평생을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대한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백야 김좌진 장군 흉상 이미지

홍성 시내에 커다란 동상으로도 자리 잡고 있는 청산리 대첩의 영웅 백야 김좌진은 대한민국 무장 독립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행보를 보였는데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좌진은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다.

김좌진 장군 동상 이미지1

나이 17세에 노비들에게 먹고살 땅을 나누어 주고 해방시켰으며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집을 판 돈으로 호명학교를 설립했다.

호명은 호서지방을 밝게 한다는 뜻으로 호서는 지금의 충청도를 말한다.

김좌진 장군 동상 이미지2

김좌진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귀감으로 지금도 이야기되고 있다.

대한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으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계열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을 때 고려공산청년회의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할일이 너무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한다니.그게 한스러워서…"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죽음보다도 국가를 되찾는 것이 중요했던 진정한 독립투사였다.

손곡 이달 작품 전시 안내 이미지

흉상이 아닌 비석이 하나 있는데 손곡 이달의 시비이다.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으로 알려진 손곡 이달은 평생을 정착하지 못하고 세상을 유랑하여 그의 생이 김삿갓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게 된다.

이달은 어릴 적부터 영특했으나 서얼로 태어나 벼슬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울분을 시문으로 분출하며 세상을 떠돌았다.

서얼 출신이었으나 뛰어난 글재주로 이이, 정철, 양사언, 허봉 등 당대 유명한 사대부들과 교류하였다.

왼쪽부터 허균, 허난설헌 이미지

허균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손곡이달을 ‘마음 가운데가 텅 비어서 아무런 한계가 없었으며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술을 사랑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시를 썼을 뿐이었다.

조선 시대 신분제도의 희생양인 손곡 이달은 평생을 방랑했으나 천부적인 시인으로 홍성의 자랑이 되었다.

위부터 아래로 손곡이달의 시, 오천 이환영 화백의 시화 이미지

현재 홍주성 역사관에서는 손곡 이달의 400년 만의 귀향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손곡 이달의 시가 홍성 출신 화백 오천 이환영 화백의 그림으로 재탄생하였다.

화폭에 담긴 손곡 이달의 시를 감상해보니 그 아름다움이 더 잘 와 닿았다.

나무에 앉은 새 이미지

우리는 그들을 잊지 않는다. 글자를 배우며 그들의 이름을 함께 익히며 기억의 학습을 시작한다.

홍성의 자랑이자 대한민국의 자랑인 그들의 업적은 후대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십 년이 지나고 백 년이 지나도 우리는 이 성곽길을 걸으며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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