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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來路홍성군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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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 이야기천년의 시간과 마주하는 열번째 이야기 지켜진 것과 사라진 것

  • 서문지
  • 목빙고
  • 북문지
앙상한 나뭇가지에 달린 붉게 물든 나뭇잎 이미지
북문지, 서문지 관광 안내판 이미지
01서문지
흔적이 들려주는 이야기1

흔적으로 기억되는 것이 있다. 오래된 역사의 대부분이 그럴지도 모르겠다. 세월의 풍파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기에 시간이 지나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기억은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조금 헤매고 있다. 분명 이쯤이라고 했는데…

홍주성 천년 여행길 지표 이미지

"안녕? 혹시 서문지가 어딘지 아니?"

지나가던 영특해 보이는 초등학생에게 물었다.

"알아요. 바로 저긴데. 우리 학교 앞이에요."

엎어지면 코 닿을 데를 두고 헤매고 있었다. 한때는 커다란 문이 세워져 못 보려야 못 볼 수가 없었을 텐데 안타깝다.

홍성 초등학교 앞으로 가니 서문지라는 표지판이 서문을 기억하고 있었다. 서문지는 일제강점기인 1913년 일본인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그 힘겨운 시절을 버텨내지 못하고 홍주성의 서문도 부서지고 말았다.

하지만 홍성은 홍주성을 복원해 내기 위해 끊임없이 발굴 보수작업을 하고 있고 최근에는 서문지 남쪽에서 수구지를 발견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이곳이 더는 서문지가 아닌 서문, 경의문의 이름으로 불릴 날이 올 수 있을까. 다음 장소로 향하며 이 쓸쓸한 흔적을 지나친다.

목빙고 이정표 이미지
02목빙고
조선의 냉동고

사라진 또 하나의 문루가 있었던 북문지로 가는 길에 ‘목빙고’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인다.

목빙고는 흔히 많이 알려진 석빙고와 달리 그 흔적이 대부분 사라져버린 만나기 어렵다.

목빙고 관광안내판 이미지
목빙고 이미지2

최근 부여에서도 목빙고 유적을 찾았다고 하는데 홍성에 있는 지금 보러 가는 이 목빙고가 국내 최초로 발견된 목빙고이다.

목빙고 앞에는 아파트 단지가 있어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근방에 마트나 자전거 수리점 같은 곳들이 있어 아이스크림을 사 먹거나 자전거 바퀴에 바람도 넣으면서 쉬었다 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괜찮기도 하다.

이곳은 ‘빙고재‘라고 불렸는데 목빙고의 발견으로 그 유래가 밝혀지기도 했다.

홍주동학기념비 이미지1

바로 옆에는 홍주동학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19세기 동학농민운동 당시 홍주에서도 1894년 7월에 이곳에 머물며 관군과 왜군에게 항거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희생된 농민군들을 기리는 비석이 바로 이곳에 세워져 있다.

  • 목빙고 이미지3
  • 목빙고 이미지4

빙고는 최대한 오랫동안 얼음을 보관하고자 공기의 흐름과 물 빠짐을 염두에 둔 듯 비스듬하나 경사각을 이루고 만들어져 있다.

이곳에 얼음을 넣고 단열성이 좋은 갈대, 솔가지, 짚을 엮어 두껍게 채웠다고 한다.

목빙고 이미지5

얼음을 보관할 뿐 겨울이 아니라면 생산할 수 없으니 그 가치는 엄청났을 테고 당시 양반들의 최고의 사치였기도 하단다.

당연하게도 채빙(얼음채취)은 양반이 아닌 백성들의 몫이었다. ‘빙고청상‘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채빙은 극한 직업의 최고봉이었으리라.

그런데 이 귀한 얼음으로 여자모양 조각을 내어 여름에 안고 있다거나 얼음 병풍을 만들어 방을 두르기도 하는 사치스런 양반들도 있었다니 참 씁쓸하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금수저, 흙수저‘ 대신 ‘얼음수저,물수저‘라는 이야기가 돌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목빙고를 바라보고 있자니 유독 추운 기분이 든다. 이제 좀 걸어야겠다.
* 빙고청상: 채빙 부역이 두려워 도망가는 남편을 기다리는 어린 부인(생과부 됨)

북문지 관광안내판 이미지
03북문지
흔적이 들려주는 이야기 2

북문지는 서문지에 비해 쉽게 찾아졌다. 일부러 찾으며 걷지 않는다면 한낮의 가로등처럼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찾으려고 하면 꽤 쉽게 보이는 위치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심하게 허물어져 알아보기 어려운 성벽의 작고 초라한 흔적이 근처에 안쓰럽게 남아 있기도 하다.

물론 오래도록 버텨온 만큼 북문은 복구를 기다리는 중일 것이다.

북문은 망화문이라 불렸다. 북문은 서문이 철거되고 2년 뒤인 1915년 철거되었다. 참 야금야금 부숴나갔구나.

북문 밖 북문교 근처에는 홍주 목사들이 사형수를 처형하던 처형터가 있었다. 이곳은 조선 시대 박해 받던 천주교인들이 처형되기도 한 순교터이기도 하다.

비극이 겹겹이 쌓여 스치는 바람마다 서글픈 공기가 가득하다.

단풍나무 이미지

홍주성은 완전한 모습이 아니지만 그나마 남은 것은 당시 홍주 주민들이 지켜낸 것이다.

지키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들에게 맞선 강한 의지를 가졌던 그들에게 감사하다. 살아남은 자들은 사라진 것을, 희생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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