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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는 현재를 만들었지만, 그 과정이 옳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상당히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대한민국은 헌법 제20조 1항에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그렇지 못했다.
아래 모두 평등하다는 천주교에 많은 백성이 관심을 가졌으나 집권층은 그렇지 않았다. 성리학으로 양반의 정치적 권리를 유지하려 천주교를 탄압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홍주성지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곳이다.
212명이 희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기록에 없는 희생자들까지 포함한다면 1,000명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연유로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 홍주성지를 찾아 순례길을 걷는다.
이름도 외관도 아름답고 편안한 분위기를 물씬 내뿜고 있는 안회당은 목사가 일을 보던 동헌으로 조선 시대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며 신자들을 잡아와 이곳에서 끔찍하게 고문했다. 너무도 평화로운 이곳에서 그런 비극이 일어나고 있었다니 이 건물과 이 공기가 너무도 낯설다.
순교를 규정하는 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실제로 죽임을 당해야 하고, 그 죽임이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초래되어야 하며,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건에 부합하는 순교자가 참 많다. 그들의 굳건한 신앙에의 믿음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신자들을 감동하게 했다.
동그랗게 모든 것을 품을 것처럼 생긴 이곳이 바로 옥터이다. 동그라미 안으로 들어서면 서늘함이 감도는 감옥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은 곤장이 있다.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인 원시장 베드로가 이곳에서 희생되었다.
신자가 되기 전 베드로는 성격이 괴팍하여 주위 사람들이 무서워했지만, 천주교를 접하고 성격이 온화해지고 어려운 주변 사람들을 많이 도왔다고 한다.
그랬던 그는 신앙을 이유로 한겨울에 물을 뒤집어쓰고 얼어 죽게 되었다.
옥사 바로 옆에는 복원된 우물이 있다. 원시장이 바로 이 우물물로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한때에 약물로 유명했던 우물물은 순교자들에게는 고문하는 용도로 쓰였다니 씁쓸하기만 하다. 우물은 마치 그때의 고통을 기억하는 듯 차가워 보인다.
박취득 라우렌시오 또한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그는 곤장을 1,400대나 맞고 8일 동안 물 한 방울도 먹지 못했다.
당연히 죽은 줄로만 알고 옷을 벗겨 밖으로 내던졌는데 살아있었다. 죽지 않는 그가 요술을 부린다며 감옥에서 새끼줄로 목을 졸라 죽였다.
1,400대의 매질을 생각하며 옥 앞의 곤장을 보니 소름이 끼친다.
조양문 근처에는 ‘진영장의 동헌‘이라고 쓰인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경사당이라 불렸으며 오늘날 군부대와 같은 곳이었다.
여기에서 내포 지역에서 붙잡혀 온 천주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신자들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사람이 가장 많이 다니는 장터인 저잣거리에서도 순교자들이 나왔다. 순교자들이 관아로 끌려가거나 처형되기 전에 조리돌림을 당하는 등 혹한 고문을 당하며 순교하였다.
저잣거리에서는 죄질이 매우 나쁜 흉악범들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온갖 멸시와 함께 고문받는 곳이었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이들과 같은 취급을 당했다.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역사가 끝이 없이 솟아 나오고 있다.
순교길은 스산함의 연속이다. 가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순교자들의 슬픈 영혼이 공기에 스며있는 듯 가슴까지 쓰라리게 한다.
참수터로 향하는 걸음마다 마음도 함께 무거워져 간다.
대교공원 월계천변에 떨어진 낙엽에 둘러싸인 참수순교터가 있다. 이곳에서 순교한 유명한 순교자는 황일관 시몬이다.
시몬은 천민 출신으로 어디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며 살았으나 천주교 신자가 된 후 교우들과 양반집에서도 평등한 애정을 받게 되었다.
대교공원 월계천변에 떨어진 낙엽에 둘러싸인 참수순교터가 있다. 이곳에서 순교한 유명한 순교자는 황일관 시몬이다.
시몬은 천민 출신으로 어디에서도 대접을 받지 못하며 살았으나 천주교 신자가 된 후 교우들과 양반집에서도 평등한 애정을 받게 되었다.
‘나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라고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당시 경기도에 이주해 있었으나 신유박해 때 체포되었다. 고향으로 보내 참수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게 하려고 그는 홍주로 이송되어 즉시 참수되었다.
그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로 시복되었다.
홍주성지 순례길의 마지막 목적지는 홍성천과 월계천이 만나는 곳에 있는 생매장터이다.
병인박해 당시 8천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희생되었는데 ‘많은 교우를 한 번에 죽이기 어렵기 때문에’ 생매장시켰다.
이곳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신자들을 산 채로 묻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아래 그들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죽었다.
이곳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신자들을 산 채로 묻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아래 그들이 살아 있었다. 그리고 죽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치 않은 희생은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준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그리고 다른 많은 것들을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며 평화의 빛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