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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來路이응노의 집

삶의 여정

고암 이응노 사진

이응노 여정

이응노는 1904년 홍성에서 태어나 1989년 파리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온 삶을 그림으로 채운 화가입니다. 21세인 1924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이후 일제강점기에 이 전람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습니다. 일본 유학을 거쳐 해방 후에는 새로 개설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지냈습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50대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습니다. 이응노는 한국의 전통 서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선보여 유럽 예술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학교를 세우고 서구 젊은이들에게 동양 예술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남긴 3만 여점의 작품은 전통 서화부터 현대의 추상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고 다양합니다.

이응노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의 치욕, 해방의 기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던 격동기였습니다.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향한 고통도 있었습니다. 이응노는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을 삶 속에서 고스란히 겪었습니다. 1960년대에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러야했고 다시는 그리던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열일곱 나이에 상경해서 도쿄로, 다시 서울로, 또 파리로, 쉼없이 이어지는 긴 동선 속에서 예술 세계와 함께 한 인간의 의식 세계가 확장해 가는 여정 또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응노는 끊임 없이 낯선 것을 받아들여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마침내는 인종·남녀·노소·취향까지 융화시켰습니다. 안주(安住)는 감히 그의 삶과 화폭에 침범할 수 없었습니다. 그 든든한 뿌리가 되어 주었던 고향 홍성에서 이 모든 것들이 녹아 들어오늘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 고향집

    참으로 머나먼 길을 돌아 이응노는 고향에 돌아왔다.
    이승을 떠난 지 22년 만에, 프랑스로 귀화한 지는 28년 만에, ‘동백림 사건’에 얽혀 어이없는 옥살이를 하고 잠시 수덕사에 머물다간 지는 42년 만에, 그에 앞서 유럽으로 떠난 지는 53년 만에, 소년 이응노가 처음으로 고향 뜨던 그 때로부터는 90여 년 만에, 그는 고향 중계리에 돌아왔다 그것도 자기 집에. 이응노 자신이 그린 <고향집>(1940년 전후)그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바로 그 터에 옛 풍모를 살린 생가가 새로 지어졌고, 거기 더해서 어엿한 기념관이 또한 장만되었다. 이번에는 고향이, 그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고향 인심들이 그를 이 고장의 한 어른으로 정중히 모시게 된 것이며, 그가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었던 고향 산천이 그를 품에 안게 된 것.
    이 산천이 낳은 한 아이가 꿈을 품고서 그 품을 떠난 지 거의 90년 만에 산천은 그를 다시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인 것. 퍽 늦기는 했어도, 오랜 세월 이방(異邦)을 배회하던 그의 유혼(幽魂)이 안식처를 얻은 셈이다, 비로소, 온전치는 않으나마. 거의 모든 예술가에게, 아니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고향이라는 존재는 여러 모로 큰 의미를 갖는다. 고향은 대지(大地)처럼 가없는 사랑의 품을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경우에 삶의 길을 나서기도 한다. 고향이 평화로웠을 수도 있지만, 그 평화로움이 사실은 어떤 억압과 어둠의 뒷면이었을 수도 있다.
    고향은 아늑한 엄마 품만 같아서 늘 그립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지만, 누구에겐가는 결코 떠올리거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일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고향은 한 존재와 한 인생의 출발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을 숙연하게 한다.
    고향은 그에게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띤다. 첫째, 그 곳은 유년기적 원체험을 통하여 세계와 소년 응노가 행복하게 화해(和諧)하고 일치하는 장소였으며, 온전한 미적 체험의 장소였다. 예술가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어느 순간에도 그는 고향을 잊지 못했다. 고향은 그의 예술에서 하나의 미적 원형이자 미학적 이념이 되었다. 둘째로, 이번엔 그 반대. 고향은 불일치, 모순, 갈등의 온상은 최초의 출발 지점으로서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에너지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오히려 떨쳐버려야 할 무상일 수도 있다.
    그래서 떠나야 할 곳. 화가가 되어 “새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서 그는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이 꿈을 품은 것. 꿈은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는가. 그는 나중에 “나는 그림에서 살고 그림에서 죽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그러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른 장소, 다른 조건·환경, 다른 제도 들이 필요했던 것. 자기 꿈과 고향 사이에 선 소년은 동구(洞口) 밖으로 내달아 저 먼 어느 곳인가로 시선을 아득하게 던질 수밖에. 소년기를 벗어나면서 세상과 자기 삶의 관계에 대한 자의식과 정체성이 움트려고 꼼지락거리는 시점에 이르러 그는 ‘가출(家出)’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고향에서 뜨기. 신화의 층위에서 비유하자면, 그것은 모태(母胎)로부터 아기가 세상으로 나오는 것과 같다. 잠의 상태로부터 깸의 상태로,
    꿈꾸기로부터 몸 일으키기, 몸 쓰기의 자리로 옮겨 앉는 형국. 이쪽 영역의 문을 나서서 다른 영역의 문으로 들어가기.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저 집에서 그 집으로, 이응노는 평생 몇 차례에 걸쳐 이렇게 자리를 옮겨 앉게 되는데, 한 자리에 눌러 앉지를 못해, 머물 만하면 뜨고,
    어지간히 평온해졌다 싶으면 그예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서기를 체질처럼 행하는 것이다.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한 군데에 못 박지 못하는 체질을
    특히나 이응노는 타고났던 것. 잠자리가 뒤숭숭해서 몸을 뒤척이는 쪽보다는, 불편한 잠자리를 자청하는 쪽이었다.
    불가적(佛家的) 몸 쓰기에 비유컨대 그것은 ‘출가(出家)’나 ‘출문(出門)’이라 부를 수 있겠다. 집[고향]이라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체질, 문을
    나서야 마음이 번듯해지는 몸바탕을 그는 지녔던 것. 그는 ‘몸을 쓰는’ 사람이었다. 이응노는 머리 굴리는 예술가가 아니라, 몸을 굴리는 사람이
    었던 것. 이성적 사유와 말잔치를 내세우는 이른바 ‘모더니스트’가 아니라, 동물적 몸씀과 비릿한 육체적 감각에 따라 춤추는 자. 구별하는
    이성보다, 참여하는 감수성에 가까운 자.

  • 이응노는 1904년 용띠 해 음력 1월,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서, 대대로 서당을 운영하며 한학을 가르치던 여항문인(閭巷文人) 집안의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어릴 적 그는 아버지 문하에서 한문과 서사(書寫)를 익혔고, 홍성 읍내의 보통학교(당시 4년제) 를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응노의 부친이 워낙 완고해 보통학교를 통해 새로이 보급되던 신식 교육을 못마땅해 했고, 거기다 아버지 서당의 학동(學童)이 점점 주는 바람에 집안 형편도 날로 어려워져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보통학교의 정규 교육을 중도 하차한 뒤에는 아버지한테서 한문을 배우고 집안 살림을 거들며 성장해 갔다.
    열 살 이전 보통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응노는 도화(圖畵) 교육을 받으면서 그림 그리기에 재미를 붙였다. 그러나 응노의 아버지는 ‘그림 같은 것은 상놈들이나 그리는 것’이라며 꾸짖기 일쑤였고, 그는 그런 아버지 몰래 혼자서 그림 그리기를 즐기며 재능을 키워 나갔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나를 도와 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나를 방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말했지만, 나는 남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줄곧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나는 외로움을 잊었다.”
    열여섯에는 관습에 따라 부모가 정해 준 대로 결혼까지 하기에 이른다. 이런 소년기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응노는 초조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 비록 궁벽한 시골이지만 신식 교육과 새 문물이 사회를 재편하고 있었고 응노 또래 아이들도 새 환경에 맞추어 살 궁리를 하는 축이 많았던 터. 토착 환경과, 문명 개화(文明開化)라는 근대 지향성 사이, 이쪽이냐 저쪽이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머리가 점차 트이는 십대 후반 소년 응노는 이 곤혹스러운 질문에 스스로 시달리게 된 것.
    “나는 결혼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었고, 그보다 내 자신의 인생에 관한 것을 차츰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일본말을 하고 서양식 양복도 입고 있어서 내가 보기에 시대를 앞서 가는 신사처럼 보였어요. 그런 모습이 부러워서가 아니라, 나는 이대로 있어도 좋은 것인가를 수없이 자문하게 되었지요.”
    서당에서 한문이나 공부하고 있을 시대가 아니라는 것, 새것을 배워야 함. 그 시대 자체가 이미 절절히 치를 떨어 가며 역설하고 주장하던 ‘새것’을 향한 열망이, 이 어린 소년에게만 없을 리는 없는 것. 더군다나, 제도 교육을 통해 심신을 정비하고 세상을 인식하고 개념적·실용적 지식을 축적해 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혜택이자 보람으로 꼽게 되는 것이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가능성일진대, 이 문을 일단 놓친 응노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마 일생 내내 어떤 식으로든 그의 삶에 작용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떡해야 할까.
    “새 시대의 거대한 물결이 다가오는데도 우리 집만이 동떨어진 채로 아무런 희망도 가질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의 새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경성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답니다. 화가가 되겠다고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모험, 개척, 그리고 자수성가(自手成家). 삶이 몹시 분주해지는 것이다. 여기서 조만간 그가 고향을 뜨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 싹터 버린 것. 떠야 하는 곳이더라도 고향은 각별한 것. 이응노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의 고향은 지금 와 보아도 아주 조용한 농촌 마을로, 홍성읍에서 이십여 리 떨어져 있다. 고향은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곳이었다. 그 자신이 회고한 바에 따르면, “남쪽으로는 월산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었고, 북쪽에는 용봉산이라고 불리는 바위투성이의 봉우리가 있는 고요하고 평온하며 한적한 시골이었다.
    “산들은 저마다 꼭 알맞은 높이와 크기를 가지고 있지만 어린 시절 내게 이 산들은 실제보다도 훨씬 커 보였다. 살아가면서 산들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올빼미 바위, 새색시 바위, 늙은이 바위, 거울 바위처럼 우리는 바윗돌 하나하나마다 이름을 붙여 주곤 했다. 그것은 단지 생김새 때문만이 아니라 그 안의 모든 것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인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은 마치 늙으신 부모님이나 형제 혹은 친구에게 끌리듯이 그 바위들에게 끌렸다.”
    그러한 자연의 품에 안겨 그는 모든 것과 사귀고 같이 놀며 ‘대화’ 했다. 이응노의 유년기 기억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이 사귐과 놂, 그리고 대화는 그에게 최초의 ‘미적 경험’이 되었다. 이 미적 경험은 그와 환경, 그와 세상 사이의 온전한 융합, 가슴 벅찬 통일감이다.
    유년 시절의 이 체험과 그것에 관한 기억은 그의 삶 전체를 뿌리로서 떠받치고 있었고 어떤 원초적 에너지가 되었다. 한 생애 동안 그가 겪은 갖은 곡절과 아픔도 그 뿌리로부터 샘솟는 원기(元氣)에 의해 정화되었다. 이런저런 상처로 시달릴 때에 그것을 치유해 주는 힘도 거기서 나온 것이었다.

  • 이응노에게 고향은 이제 벗어나야 할 곳이 되었다. 유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삶의 최초의 근거였던 고향과 집안, 그리고 그 곳을 받치고 있는 문화적 토대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나이 열 아홉, 소년티를 벗으며 머리 굵어진 청년은 유소년기의 둥지를 떠나 새 길을 찾아 나섰다. 자, 떠나고 보는 것이다. 손에 쥔 것 아무 것도 없이, 그야말로 혈혈단신 외돌토리로, 장래를 보장할 만한 아무 밑거름이나 터무니도 없이, 무작정 걸음을 떼어 옮기고 보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그를 이끄는 것은 오직 알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오리무중의 미래뿐이었다.
    드디어 응노는 1922년, 상경을 감행한다.
    경성에 도착한 그는 생계를 위해 장의사에 취업하여 상여에 장식 그림 그리는 일을 한다. 얼마 후, 해강 김규진(海岡 金圭鎭, 1868~1933년)을 찾아가 문하에 들게 해 줄 것을 십 수 차례 간청한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았다. 스승의 서생(書生) 노릇을 하며, 먹 갈고 집안 청소하고, 자제를 유치원에 데리고 다니는 등 허드렛일을 하면서, 밤이 되어야 겨우 그림 그릴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스승의 화본(畵本)을 익히면서, 산수·인물·화조·사군자·영모·어해·기명절지 등 문인화법과 서예를 두루 익혀 갔다.
    예술가로서 이응노는 이렇게 서화(書畵)에서 출발했고, 그것이 그의 작품 세계의 첫 국면(1924~1935) 을 이루었다. 그를 서화가로서 예술계에 등재시킨 첫 공식 작품은 <풍죽(風竹)>인데, 이 그림은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의 제3부 ‘서 및 사군자부’에 출품하여 입선한 것이다.
    스승의 집에 기숙하며 그림을 배운 지 2년 남짓 되었을 때 응노는 그림에 좀 더 매진하기 위해 독립했다. 그러나 생계가 문제였다. 표구점과 간판점에서 한 해 남짓 일하다가 1926년, 스물세 살 되던 해에 전주로 내려가 ‘개척사(開拓社)’라는 간판점을 차렸고, 수완이 좋은 그는 그것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생계를 돌보는 사이에 그림은 아무래도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 《조선미전》에 해마다 출품은 했지만 여섯 해를 내리 낙선하였다.
    그러다 어느 해, 친구네 돌잔치에 가는 길에, 비바람에 어지러이 춤추는 대숲에서, 입때껏 자신이 그려 온 대그림이 판에 박힌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뿔싸! 내가 여태 ‘대나무를’ 그려 온 게 아니라, 대나무 ‘그림을’ 베껴오고 있었구나! 자, 그럼 인제 응노의 그림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림을 보고 그림 그리기로부터, 대나무를 보고 그림 그리기로, 바뀌지 않겠는가.
    전통 문인화의 주요 주제인 사군자와 더불어 시작된 그의 초기 작업은 과거의 주제와 미감, 그 형식적 틀, 그 이데올로기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말 그대로 관례를 따른것이지 작가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응노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미전》을 통해 일제 강점기 내내 반복 재생산된 사군자는 당대 즉 ‘현재(現在, The Present)’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20대를 “우리 나라 전통의 동양화와 서예적 기법을 기초로 한 모방 시기”라고 회고했듯이, 이 그림들에는 작가가 몸소 겪은 세계에 관한 그 어떤 실마리도 들어 있지 않다. 그것은 현재라는 당대의 조건 안에서 산출된 것이 아니며, 오래 묵은 문화적 관성의 거의 마지막 그림자처럼 보인다——말하자면 이미 관례화된 기존의 ‘공식’. 공식 베끼기로서의 그리기. 기억하기로서의 그리기. 그러면, 옮기기, 베끼기, 기억하기로서 의 그리기 말고 다른 그리기가 있었을까?
    그가 고향을 무단 가출하여 경성에 무단 잠입하였을 때 그의 앞에 놓인 것은 무엇이었을까. 도시. 전원이 아니라, 그의 육신을 도시가 둘러싸고 있었던 것——1920년대, 경성. ‘모던(modern)’ 도시, 거기엔 온갖 새로운 살림살이가 펼쳐져 있었다. 전기, 전차, 도로, 모던 뽀이, 모던 걸, 다방, 극장, 자동차, 전화, 신문, …… 그리고 ‘미술(美術)’이라는 것——동양화, 서양화, 조각, 공예. 전통 회화는 그 새 종목들 사이에 ‘서’ ‘사군자’라는 이름을 빌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비실거리는 품새를 벗을 수 없었다.
    옛것은 비실거리고 새것이 떵떵거리는 형국. 더군다나 ‘산수’니 ‘서’니 ‘사군자’니 하는 옛 품새를 가지고는 어지러이 소개되고 유통되는 ‘신문명’이나 ‘모단 라이프(modern life)’를 마주하기 어렵잖겠는가.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서’니 ‘사군자’니 하는 게 ‘예술’이냐,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끓는 판이었다.
    그 당시 이광수(李光洙, 1892~1950년)나 변영로(卞榮魯, 1898~1961년) 같은 지식인들도 나서서 동시대의 서화는 “단지 선인(先人)의 복사(複寫)요 모방(模倣)이며 낡아 빠진 예술적 약속을 묵수(墨守)”할 뿐 ‘시대 정신’은 결여된 예술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다.
    이응노가, 또한 당시 거의 모든 그림쟁이가, 자신이 서술하는 문장의 주어가 아니었던 것(혹은, 주체일 수 없었던 것). 그들 주변에는 유령들이 득시글거렸던 것——서화라는 유령, 미술이라는 유령. 그들이 무엇인가를 하긴 하는데 대체 그 무엇을 ‘어떻게’ 또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해 어떤 자각을 할 정도로 의식이 여물지는 못했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는’ 의식일 텐데, 그런 물음이 당대의 서화가들에게는 미처 준비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럴 경우 예술가의 존재라는 것은 자칫, 원격 조종되어 그림을 쏟아 내는 TV 모니터와 비슷한 처지가 될 수밖에. 그렇다면, 가까스로 질문은 던졌으나 스스로 해답을 내놓기엔 곤란한 지경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또다시 ‘가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다른 길을 찾아야 했던 것. 이미 도시에는 ‘미술’이라는 새 길이, 마치 신작로 나듯 나 있었고 적지 않은 화가들이 그 새 길을 걷고 있었다. 저 길이라면 어떨까. 그의 나이 30대에 들어선 응노는 일본으로 향했다.

  • 도쿄에 정착한 이응노는 20대의 유학생들처럼 미술 대학에 가지 않고 사설 강습소 [가와바타 미술 학교(川端畵學校), 혼고 회화 연구소(本鄕繪畵硏究所)]나 개인화실 [마츠바야시 게이게츠의 덴코 화숙(天香畵塾)]에서 서양화와 일본화를 배웠다.
    그는 특히 ‘사생(寫生)’ 을 강조했던 스승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 1876~1963년) 에게서 깊은 감화를 받았다. 물론 1930년 무렵의 대숲 일화에서 이미 그 자신이 ‘사생’에 눈뜬 바 있었지만, 마츠바야시의 가르침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고 한다.
    일본에 건너간 이후 해방 직전에 귀국하기까지, 10년을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조선미전》과 일본의 《일본화원전》 등에 출품하며 활동하는 동안, 이응노는 주로 ‘풍경화’를 그렸다. 그 사이에 전주와 경성 등지에서 개인전도 여러 차례 열었는데, 그는 자신의 풍경화를 ‘신남화(新南畵)’라고 불렀다. 사생을 기본 틀로 삼는 신남화를 통해 이응노는 ‘서화가’로부터 ‘동양화가’로 전신(轉身)했다.
    ‘서화’에서 출가하여 ‘미술’로, ‘사군자’에서 출문하여 ‘풍경화’로 입문(入門)한 것. 그를 작가로서 성장하게 한 서화/사군자의 품을 떠난 것.
    그런데 그는 왜 다시 고향(서화)을 떠나야 했을까. 사실 사정은 간단하다. 1920~1930년대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한 소비 도시의 면모를 이미 유감없이 지녔던 경성의 삶을 드러내는 데에 종래의 지필묵과 그것을 통해 수행되는 서화의 문법이 일종의 언어로서 가질 수 있는 효용의 폭은 그만큼 비좁을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이대로 사군자 울타리에 갇혀 지내다가는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겠는가. 소년 시절 고향에서 느꼈던 위기 의식이 문제를 달리해서 또 나타난 것. 위기감에 다시 한 번 조바심 나게 된 것.
    말하자면 ‘모던 라이프’를 재현하는 데에 서화 대 미술, 사군자 대 풍경화에서 어느 쪽이 유리할까. 새롭고 낯선 삶을 상대하는 데에 새롭고 낯선 예술 형식이 가진 상대 우위가 있지 않았겠는가. 어떤 삶의 조건과 형식이 자기한테 걸맞은 예술 형식을 데리고 다니는 것임은 자명한 것이다. 이러니 당대의 많은 지식인들이 ‘신문명’과 미술이라는 새 예술 패러다임에 열광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럼 서화/사군자라는 고향을 떠나 미술/풍경화에 입문한 뒤 ‘사생’을 화두로 삼은 그의 몸은 또 무엇을 얻었는가. 현실을 보게 된 것. 내 몸 ‘앞에’ 강렬하게 현존하는 또 한 몸인 현재-세계(바꿔 말하면 ‘이승’)를 ‘직시’하게 된 것. ‘현재’에 몸 담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게 된 것. 내가 세상을 보고 있다는 자의식이 싹튼 것.
    후 에 그는 이맘 때의 자신을 이렇게 회고했다 : “ 자연 물체의 사실주의적 탐구 시대.” 미술이라는 새 길을 따라 걸으면서 그는 이승의 풍경과 삶을 기록했다. 꼼꼼하게, 하나하나 톺아 가며, 돌아서면 잊을까 하여 본 것을 그대로 ‘기입(記入)’한다. 기입하는 자. 이승에 속하지 않는 먼 이상을 동경하며 속진(俗塵)을 초월하고자 하는 심산이 아니라, 있는 것을 그것이 놓인 그 자리에서 확인하고 갈무리하기.
    따라서 인제 이응노의 그리기는, 서화적 쓰기와는 다른 차원에서, 쓰기가 되는 것. 그는 바짝 긴장해서 쓴다.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가며 10년을 그렇게 ‘땅을’ 밟았다. 바지런히 움직여 풍경에 몸을 쐬었다.
    숱한 그의 스케치와 그림에는 30대 장년의 이응노가 몸을 굴린 경로와 흔적이 그대로 적혀 있다. 서화로부터 미술(동양화)로 길을 옮겨 얻은 가장 생생한 성과는 1944년 작 〈홍성월산하(洪城月山下)〉에 나타난다. 고향이어서일까. 그림 안에 기념비적이라고 할 만한 요소는 없지만, 그림으로 둔갑한 그의 고향은 화면 안에서 생기를 띠고 지금도 숨 쉬고 있다. 오로지 몸을 굴리고 땀 흘려서 얻은 생기.

  • 그런데 이응노가 20~30대 청장년 시절, 서화와 미술(동양화)이라는 길을 걸어오는 동안, 세월은 어떠했는가. 식민지 상황이라는 모진 세월 아닌가. 아뿔싸! 식민지라는 삶의 조건 안에서 수행하게 되는 서화와 미술. 식민주의 문화 정치라는 울 안에서 그리기. 서화와 미술 위에 조선총독부의 정치와 그의 힘(규율 권력)이 있었던 것. 《조선미전》이라는, 유일한 작가 공인(公認) 장치가 그것. 작가 지망생들은 《조선미전》이 권장하는 예술 이념[순수 미술!—그림은 그림일 뿐, 오해하지 마시길!]과 스타일 (고전주의+인상주의)과 주제(한산하고 적막한 산천, 도시 뒷골목, 고적한 문화 유산, 무기력한 여성과 아이들, 멍한 시선을 한 신여성, 정물 등)에 갇혀 있어야 했다.
    서화의 관념 티를 떠나 현실을 보게 되었지만, 작가들은 현실의 구조를 분석·비평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현실의 피부를 쓰다듬는 데에서 그쳐야 했다. 내심 한구석에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자의식 같은 것이 자리 잡았더라도 그것이 화면에 드러나는 것은 곤란했다. 식민지 문화 정치가 요구하는 ‘향토주의’가 온상(溫床)으로 자리 잡았고, 화가들은 그 비닐막 안쪽의 따스한 공기—순수 예술—에 적응했다.
    이응노도 그 식민주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늘 몸을 굴리며 땅을 밟고 다녔다는 것. 풍습과 풍광을 자신의 몸 안에 차곡차곡 쌓아 갔던 것. 그 체질과 버릇이 온축되어 ‘식민지 이후’에 성과를 보인다. 해방 공간에 그린 걸작은 역시〈거리 풍경— 양색시〉(1946년)이다. 거리낌 없다. 이로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자신의 40대를 살면서 그는 사람을 만난다. 사람, 사람, 사람. 30대의 풍경에 이어, 40대엔 풍경에 섞여 사는 사람을 그린다. 그것도 도시. 30대엔 자연, 40대엔 도시-사람. 1940~1950년대 도시의, 보잘것 없고, 해어지고 밑바닥 훤한, 뒤숭숭하고 비릿한 삶과 상처에 붓을 적신다. 〈영차영차〉(1954년)와 〈취야〉(1955년)를 보라. 이렇게 비릿하고 찝지름한 땀냄새가 숨을 막을 정도로 풍겨 오는 그림이 있던가. 영차, 영차! 마지막으로 남은 몸뚱어리를 놀리며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민초들의 신산하고 옹색한 낮과 밤이 그림에는 드물던 연대에, 어렵사리 이응노가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이쯤부터이면, 서화니 미술이니 하는 틀거리가 문제되지 않는다. 곤경에서나마 건강한 삶의 늪이 있고, 그것을 비켜 가지 못하는 그의 체질과 버릇이 있고, 그의 몸을 따르는 붓과 종이가 이응노에게 있을 뿐이었다. 예술이란 말이여, 하는 투의 폼 잡기가 그에게는 없다. 아니 평생, 그는 폼 한 번 잡을 겨를이 없었다. 그림 그리는 일이 유일한 일로서 그를 이룰 따름이었다.

  • 해방 공간에서 1950년대 중반에 이르는 사이, 이응노의 그림은 해방 이전에 비해 아주 활달해졌다. 예전에는 풍경을 정중하게 묘사하는 태도가 앞섰는데, 해방 이후에는 화가의 흥이 앞선다. 풍경과 사람들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그 자리에서 바지런하게 적듯이 붓놀림에 율동이 실린다. 이전에는 정좌하고서 꼼꼼하게 살펴가며 풍경을 적어 넣듯이 했는데, 인제는, 특히 6·25 이후에는 풍경의 인상만 포착하면 그 다음엔 붓이 화가의 흥취를 타고 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아주 붓놀음으로 빠지지도 않고, 대상의 상태나 성격, 분위기, 생기(生氣)는 그대로 챙겨 들인다는 데에 이즈음 그림의 맛이 있다 (아까 보았던 〈영차영차〉나 〈취야〉도 그랬고, 〈악사〉나 〈매춘〉 같은 그림도 같이 보라. 1958년, 《도불전》 출품작들에서는 사람은 대체로 빠지고 숲이 주요 주제로 등장하는데, 거기서도 이러한 특성은 확연하다). 그러니,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맛보게 되는 흥겨운 붓의 율동은, 대상에 취한 화가의 몸놀림을 타고 내리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다 어지간히 되면 이번엔 붓이 대상을 타고 노는 데에서도 오고, 그러다 종내 대상이 붓을 타고 이 쪽으로 번져오기도 하는 것. 시나위 가락과 진배없다.
    세상과 화가와 붓과 그림이, 거기다 감상자까지 더해져, 유쾌하고 활달대도(豁達大度)한 판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대상이 붓을 얽어매지 않고, 붓이 대상을 가벼이 처단하지 않는 중용(中庸)의 경개(景槪)가 1950년대 중반 우리 회화사에 있게 된 것.
    이즈음의 작업을 이응노 자신은 “사의(寫意)를 중심으로 현대 회화로서 동양화가 개척해 나가야 할 새 길을 탐구 중 ” 또는 “반추상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자연 사실에 대한 사의적 표현”이라고 했다. 20대에 사의(寫意)에서 출발하여, 30대에 사생을 체득하고, 40대를 거쳐 50 고개에 이르러 사생과 사의가 자욱이 분간되지 않게 얼크렁설크렁, 한 몸 되게 터 버리니, 가히 쾌연한 광경이다.
    그렇다면, 이맘 때, 곧 1950년대 중후반 화단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전쟁 이후의 후유증에 몹시 휘달리고 있었다. 삶은 죽음/죽임 이후에 겨우 남겨진 찌꺼기와 진배없었다.
    시인 고은은 1950년대를 일러 ‘폐허’라 했다. “생은 곧 죽음의 경계 없는 이웃이었다. 죽음 바로 옆에서 생이 죽음에 의존해 있었다. 죽음이 생의 둘레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 허무란 어디서 흘러 들어온 수식의 아류가 아니라 그런 폐허에 자생한 잡초 위에 펼쳐진 자생의 숨이었다. / 폐허의 자본은 허무이다. / 도시들과 산야는 그런 / 폐허와 초토로서의 허무의 출생지였다. 그러므로 살아남은 인간의 온갖 심상의 구석들에도 지울 수 없는 허무가 숨결로 새겨졌다.”
    해방 이후 세대로서 그림에 발 들여 놓은 자들이 거기서 폐허와 허무를 어머니요 고향 삼아 시작했던 것. 폐허를 고향으로 하고 허무를 육신으로 삼은 자에게 그의 내면은 다만 격정 말고 무엇이 있었으랴. 무슨 분노, 무슨 방향 모를 정열만으로 뭉쳐, 더 아득하고, 더 멀고, 더 진하고, 더 세고, 더 무엇무엇한 무엇을 향하기는 하되, 도무지 오리무중(五里霧中)인 지경에, 아뿔싸, 간간이 어디서 무적(霧笛)이 울린다. 바깥으로부터.
    《조선미전》으로 등단한 몇몇 모더니스트는 서둘러 파리로 뜨고, 해방 뒤 서울대니 홍익대니 하는 우리 손수 만든 교육 기관서 미술을 얻어 들은 젊은네들은 일본이나 유럽·미국 잡지를 뒤적이며 눈 감고 먼 곳을 그렸다. 바깥으로. 모더니스트를 자처하는 화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국제화’ 나 ‘동서 융합’ 을 외쳐댔고, 한쪽에서는 김환기처럼 ‘한국적인 것’을 물색하며 동양화/서양화들이 서로를 권장하는 풍습도 생겼고, 젊은네들은 구라파의 2차 대전 이후 세대의 분노와 정열에 공감했다.
    “피와 적 그리고 결코 숙련되지 못한 표현들과 거의 영구적인 가난 또 그리고 한심한 취기의 시대”였던 그 때, 이응노도 전쟁 직후 몇 년은, 그렇게 바지런히 몸을 일으켜 거리를 누비며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술에 취해 살았다. 취기를 겨우 면하면 다시 그림이었다. 그런 중에 문득 그에게도 무적이 울려왔다. 뜨기로 하고 서둘렀다, 구라파로.
    또 뜨게 된 것. 지필묵을 타고 노는 것에서 무애지경(無碍之境)을 자처하지는 못해도 어지간한 자부심은 있었을 터이다. 주변에서도 격려했다. 이번엔 집 근처가 아니라,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닿는 이역만리(異域萬里)였다.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그는 그림 수십 점 싸들고, 천연덕스럽게, 떴다. 쉰다섯. 평온하게 폼 잡고 앉아 놀 수도 있는 나이. 그의 버릇과 체질이 들썩이며 그를 다시 일으킨 것.
    쉰다섯 해 동안의 모든 시공간을 유일한 고향으로 묶어 놓고, 그는 떴다. 앉아서 무얼 한다는 것은 곧 어디로 뜨기 위한 채비인 양, 그는 그렇게 살았다. 몇 번째 출가인가.

  • 이번 것은 이전의 가출/출가와는 아주 성격부터 다른 것. 물 설고 낯 선 곳. 구라파라는 시간과 땅이 거느려 온 과거와 현재라는 것은, 이 쪽 동북아 것과는 판이하지 않은가. 청년의 혈기로 유학하고자 하는 바도 아니고, 무엇이 그리워 그는 노구(老軀)에 접어드는 육신을 이끌고 만리 밖으로 출타하려 했는가. 모든 고향—홍성, 서화, 동양화, 서울, 한국—을 접어두고. 고향이 ‘폐허’였으므로? 폐허가 아니었으면 그는, 뜨지 않았을까?
    파리에 시달릴 것은 없었다. 눈만 뜨면 한시도 가만 있잖고 몸 놀려 그림 그리는 사람이었다고 여러 사람이 누누이 증언하는 바대로, 그는 몸을 굴리면 되었던 것. 외국어와 외국 그림과 외국 여자와 외국 남자와 외국 학자와 외국 문화와 외국 풍습과 외국 음식 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는 무사 태평이었다. 그가 어딜 가든 그 곳은, 그가 둥지만 틀면 그 곳은 그의 고향이 되었다.
    거기서 무얼 보았을까? 거기도 전쟁 후의 폐허가 아니었던가. 거기서도 화면으로부터는 세상 자취가 온통 지워지고 있었다. 그는 파리 초기에, 이른바 ‘앵포르멜’에 공감되었다. 아니, 파리가 오히려 이응노의 새로운 방법에 공감하였다. 이승에 실존하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도 화면에는 기입되지 않았다. 다만 어떤 문명이 파국적으로 해체된 뒤에 남은 마지막 흔적처럼 폐허의 허무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절규마저 잦아든 뒤, 모든 것은 끝나고, 아직은 무엇도 시작하지 않은 듯한 공허의 시공간. 파리의 첫 서너 해를, 아주 가난한 상황에서 이응노는 폐지나 한지를 구기고 찢어서 캔버스에 밀집시켰다.
    망연자실(茫然自失), 언어와 역사가 사라진 이후(以後), 침묵의 공간. 물론 침묵이 다만 부재(不在)일 리는 없다. 미처 형태를 얻어 가지기 이전의 혼돈 ; 불규칙하고 이리저리 떠다니는 원초의 힘들 ; 아직 이름[名]에 다다르지 못한 시원의 몸짓. 따라서 그의 침묵은 모든 것의 이전(以前)이었다. 말, 역사, 이름 이전의 것이므로 그것은 여백(餘白)이었다. 없음으로부터 있음까지, 있음으로부터 다시 없음까지 ; 여백으로부터 형태까지, 다시, 형태로부터 여백까지. 있음의 기원으로서의 없음 ; 없음의 기원으로서의 있음 ; 형태의 기원으로서의 여백 ; 여백의 기원으로서의 형태.
    1950년대 그 자신의 ‘반추상’을 건너 파리에 둥지를 틀었을 때 그 곳은 ‘추상’이 되었다. 구상이 반추상을 건너 추상으로 내빼는 게 일견 도리일 성싶지만, 파리의 이응노에게 구상은 추상의 여백이요, 추상은 구상의 여백일 뿐이었다.
    초기 몇 해의 폐허와 침묵을 지나자 이응노의 몸 저 안쪽으로부터 하나의 기원이 스멀거렸다. 우리가 흔히 〈문자 추상〉이라고 부르는 그림들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허무로서는 변한 게 없는데, 까마득한 선 사(先史)의 웅얼거림 같은 것이 일렁이게 된다. 직전의 폐허로부터 어떤 최초의 흐느낌이나 감흥처럼 좀 더 시원의 형상이 떠 오르는 것. 말의, 문자의, 사람꼴의 기원 같은 것. 언어와 문자와 역사 이전의, 미발(未發)의 원형상 같은 것. 그것은 모든 것의 고향. 그것은 이후의 이응노에게, 모든 고향을 떠난 이응노에게, 하나의 고향이 되었다.
    1960~1970년대를 흐르는 〈구성(Composition)〉 연작은 문자 비슷한 형태를 근간으로 한다. 거기에는 나무, 바위, 구름 같은 자연물의 흔적도 있고, 서 있거나 앉거나 뛰거나 걷거나 춤추거나 벌떼처럼 모였거나 어깨 겯고 춤추는 듯한 사람들의 모습도 들어 있다. 그러므로 1980년대에 좀 더 집중한 〈군상(群像)〉 연작도 1960~1970년대가, 아니 서화를 통해 처음 입문하던 시절의 사군자·서예부터 풍경, 인물 연작과 반추상을 건너 파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녹아든 그림이 된다. 발원지의 샘에서 시작하여 강 하구에 이르러 모든 여정이 융화하는 것과 한 가지 이치를 그에게서 본다. 파리 이후에는 파리 이전과 그 이후가 온전히 화해하고 있는 것. 적어도 이응노에게서 ‘이전’ 은 ‘이후’에 의해 배제되거나 삭제되지 않는다. 이후는 이전을 포용하여 좀 더 큰 차원으로 끌어올려 화해한다.
    이응노는 자기 예술의 근원을 서예라고 강조했다. 서예는 글씨와 그림의 두 차원을 뛰어나게 화해시키는 매우 이상적이며 인상적인 영역 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서예와 문인화를 그려 왔기 때문에 그 경험으로 말한다면, 서예의 세계는 추상화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 서예에는 조형의 기본이 있어요. 선의 움직임과 공간의 설정, 새하얀 평면에 쓴 먹의 형태와 여백과의 관계, 그것은 현대 회화가 추구하고 있는 조형의 기본인 것이지요. / … 이 한자는 원래 자연물의 모양을 따서 만든 상형 문자와 소리와 의미를 형태로써 표현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자 그 자체가 동양의 추상적인 패턴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 … 그러니까 내 경우에 추상화로의 이행은 서(書)를 하고 있었던 것, 그것으로부터의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로 인해서 새로운 구성적인 이미지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 우리 나라의 오래된 비석처럼 그 낡은 돌의 마티에르, 돌에 새겨진 문자 등 오랜 세월에 걸쳐 풍우를 견디어 온 비석들의 문자는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나는 그런 세계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문자에 관한 테크닉을 연구하기 시작했어요.”
    그 곳에서 이응노는 모든 재료를 섭렵한다. 눈에 뜨이고 손에 닿는 모든 것이 스스럼없이 그에게로 와서 그림이 되었다. 옷가지며 이불, 솜, 비닐, 한지, 붓, 유화 물감, 캔버스, 나무 토막, 통나무, 천조각, 돌, 목판, 석고, 흙, …… ,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모든 것과 어울리고 모 든 것과 사귀고 모든 것과 놀았다. 인젠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으로서, 무엇을 어떻게 그린다는 차원에서 시원하게 떠나, 모든 것과 어울려 노는 아이가 되었다.

  • 그에게는 고향이 하나 더 있다. 모든 고향을 떠났던 그는 아주 예외적인 방식으로 고향-한국을 찾았고, 교도소라는 이상한 장소가 그 이후의 이응노에게 또 하나의 고향이 되었다. 이른 바 ‘동백림 사건’. 고암 부부는 옥중 생활이 삶과 사회에 대해서 깨우치게 해 준 ‘학교’였다고 말한다.—“거기서 나는 전혀 모르던 세계를 조금씩 알게 되었어요.” 그들은, 사회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격리되고 소외되어 있는 그 곳이 사실은 사회의 모든 요소와 차원이 그대로 재현되는 ‘축소판’임을 알았고, 순진하고 나약한 보통 사람들로부터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 비좁고 밀폐된 작은 사회는 세상의 거울이었다.
    그 곳은 작업실이기도 했다.
    “옥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림쟁이인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간장을 잉크 대신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시작했지요. 또 밥알을 매일 조금씩 아꼈다가 헌 신문지에 개어서 조각품도 만들기 시작했어요.”
    “어릴 때 가난하게 보냈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것은 뭐든지 재료가 되었답니다. 농사일을 하면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나뭇조각이 눈에 띄면 그걸 깎아 조각을 하고, 신문지를 풀에 개어 오브제를 만드는 식으로 말입니다. 데생도 연필이나 붓이 없으면 젓가락으로 대신했고, 간장을 잉크 대신 사용하기도 하고…, 그런 것은 어린 시절부터 했던 일이지요.” 자신을 물리치고 배제하고자 하는 힘에 정면 대항할 도리라고는 그 자신으로서 사는 수밖에는 없었을 것. 거기서 그는 변형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억압의 구조를 운신의 조건으로 화학 변화 시키기. 존재의 형태를 규정하는 조건을 여백으로 만들고, 그 여백을 새로운 조건으로 삼아 살기-그리기. 여백이 된 감옥. 그의 체질은 거기서 그렇게 자신을 위한 또 하나의 길을 텄고, 눈을 씻고 마음을 닦아, 이상한 것과 화해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하여 거기서 그는 자신의 노안(老眼)에 침침하게 끼어드는 어두움을 걷어냈고, 그는 다시 청년이 되었다. 밥알을 이겨서 신문지와 개어 만든 종이 찰흙으로 빚은 사람들 형상을 보라. 춤. 거기엔 머언 4~5세기적 신라·가야인들이 빚었던 토우(土偶)들의 축제가 다시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춤. 2년 가까운 유배(流配)의 삶 끝에 그는 수덕여관 너럭바위 품에 안긴다.
    나뭇가지를 주워 땅바닥에 무언가를 그리던 소년이 고향에 돌아 온 것. 고향에 돌아온 노인은 다시 소년이 되어, 바위를 쓰다듬는다. 가장 어릴 적 자신을 태우고 놀았던 바위 품에 안겨, 다시 꿈을 꾼다. 범물중생(凡物衆生)의 몸과 그림자와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삶과 죽음과 어두움과 밝음과 어엿함과 초췌함과 폄과 접음과 드러남과 숨음과 있음과 없음과 저기와 여기, 말로는 다 섬기지 못할 모든 것을 품고자 했다.
    고향은 모든 것을 생각하게 했다. 수덕여관 너럭바위 그림은 지금도 비 바람이 쓰다듬고 천둥 번개가 두드리고 산새가 놀다 가고 솔잎이 내려앉고 사람이 찾고 달이나 별빛도 들러 간다. 거기서 그렇게 숨 쉬고 춤을 추며 그는 나이를 먹어간다. 그 춤이 1980년대에 활짝, 봄 산에 진달래처럼 활짝, 피어난다.

  • 이응노 하면 〈군상〉을 먼저 떠올릴지도 모른다.
    둘, 셋, 다섯, 혹은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어울려 춤추는 그림. 마치 고향 찾아 한천(寒天)을 가로지르는 기러기 떼나, 흩날리는 꽃잎처럼.
    그 그림들은 특정한 사람들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냥, 사람이다. 이름도, 성도, 인종도, 민족도, 사는 곳도, 출발한 곳도, 가야 할 곳도, 나이도, 학력도, 경제적 환경도, 정치적 성향도, 취미도, 특기도, 혼인 여부도,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도, 수제천(壽齊天)을 좋아하는지 베토벤을 좋아하는지 바흐를 좋아하는지도, 동물 애호가인지 아닌지도, 그림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도무지 사람 비슷하다는 점 말고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사람들.
    왜 그는 사람을, 그토록 그렸던 걸까? 저 가마득한 모를 사람들을, 그는 왜 그토록 그렸던 걸까? 무슨 꿈을 꾸길래 그는, 그 아무 것도 미처 시작되지 않은 어느 광야에 스멀스멀 이는 최초의, 가장 느린 움직임처럼, 또는 햇아이가 터뜨리는 최초의, 가장 다급한 울음 소리처럼, 사람을, 사람-사람-사람을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려야만 했을까?
    허연 종이에 다만 가뭇한 먹물만으로(간혹은 담채를 더하여) 수천 수만을 좋이 헤아릴 사람을 그린 것. 그 그리기는 차라리 ‘부름’이 아니겠는가——사람아, 아 사람아, 사람이여, 사람이여. 이승 삶의 막바지에 이른 한 원로(元老)로서 이승 뭇 삶들에게, 말 바깥에서 형상을 통하여 전하는 뜻이 이것. 무엇? 어울림? 서로 다르고 반대되는 것들끼리 화해하기? 시나위 합주처럼 전후 좌우 상하 사이에 서로 너나들며 놀기? 용서? 평화? 수평적 교유(交遊)?
    그러다 문득, 그는 꽃처럼 졌다. 모든 고향을 뒤로 하고, 모든 고향으로부터 그는 다시 출가한 것. 이승의 행적을 다시 여백으로 두고 홀연 가출한 것. 지상의 춤으로부터 그는 다시 어디로 입문할 걸까. 지상에서 산 한 삶을 모태로 하고서 다른 세상으로 출생한 그는 지금 무엇과 어울려 무슨 춤을 추고 무슨 노래를 부를까.
    이응노가 평생 그려온 공간 이동 궤적은 인상적이다.
    홍성→당진→서울→전주→도쿄→수덕→서울→수덕→서울→독일 각지→파리→서울(안양·대전 교도소)→파리→도쿄→평양→파리. 굵직한 이동 경로만 짚어도 이렇다. 그는 평생 수많은 관계와 상황을 겪으면서 가는 데마다 다양한 변화를 일구었다. 그런 유랑의 세월을 사는 동안 그는 내일을 기약하지 않았다. 오늘만이 유일한 날이었다. 바로 지금만이 그에게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존재의 속도를 한껏 늦추어 자신의 순간에 범물중생의 꿈과 시간과 상처와 설움을 집중시켰다. 거의 정지된 자신의 순간에 그는 자신의 몸을 열고 한껏 세계와 대화했다.
    시체(時體) 언어 대신 그는 미소로 대화했고, 미소는 모든 울타리에 작은 문을 내어 서로 드나들게 했다. 그는 많은 것의 접경에 있었던 것. 동백림 이후의 스케치북에다 이응노는 조국과 온 세계가 평화로운 삶을 살기를 기원하는 메모를 숱하게 남겨놓았다. “영원 인류 평화”, “사해 형제(四海兄弟)”, “평화”, ‘민주로(民主路)’, ‘자유화(自由花)’.
    뜻도 까닭도 없이 듣기 좋은 말을 쏟아 놓은 게 아니다. 이들 메모는 그의 평생에 아로새겨진 상처와 고통, 고독으로부터 터져 나온 것. 그 상처와 고독, 그리고 고통은 한 세기 내내 식민지 삶의 체험, 분단·전쟁·냉전·독재 체제 같은 제도의 폭력에 시달리며 근근이 연명해 온 한반도 백성 모두의 것이 아닌가. 그런 자각을 이응노는 온 천하 백성 모두의 삶으로 펼쳐 생각한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뼈에 사무쳐, 그는 스케치북에, 나무 베개에, 그의 작품에 수 도 없이 그 염원을 새겨 넣을 수밖에 없었던 것. 그가 어릴 적, 고향 자연과 인심을 자양분으로 성장하는 동안 누렸던 그 평화의 느낌을 ‘회복’하고 싶었던 것.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사귀고 대화하는, 그런 화해의 공동체에 대한 꿈을 그린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겠는가.
    삼라만상 범물중생의 화해를 기원하는 순간, 꿈에 사무칠수록 마음 한구석엔 외로움이 컸을 것. 1976년 어느맘 때 스케치북엔 이렇게 적었다 : “사람이 세상에 살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귀로 듣고 눈 으로 보고 입으로 먹고 코로 냄새 맡는 것에 의하여 항상 마음은 어지러운 것이다.” 시시때때로 그는 다시, 엄마 품을 그리는 소년이 되기도 했다. 여행 중에 산을 만나면 조국 산천을 생각하고, 밭을 만나면 조국 전답을 그리고, 숲을 만나면 고향을 떠 올리고, 구름 흐르는 모습을 보면 고향 하늘을 생각했다.
    1986년 9월, 그는 평양서 열리는 개인전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탔고, 한반도 상공에 다다르자 창밖에 펼쳐진 구름 바다에 감격하여 그 광경을 그렸다—“1986년 9월 12일 조국 상공에서 감격의 운해(雲海).” 그러나 그는 끝내 이승의 몸으로는 자신의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숱한 울타리를 넘나들며 살아온 터였지만, 그 자신과 조국 사이에 그어진 야릇한 울타리는 결국 넘지 못한 채 조국 상공에 떠서 울어야 했다.
    그가 파리에서 자주 “나는 충남 홍성 사람이여.”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 오는 걸 보면, 그래도 그의 모든 그림이 이 곳 월산 용봉산 덕숭산이 거느린 산천과 인심을 모태로 해서 피어난 꽃임도 알겠다. 하늘 땅 바람 구름 비 눈 꽃 들이 사람을 가르치려 들지 않고, 그저 가만히 품고서 노래를 들려 주고 있을 뿐임을, 여기 홍성 중계리에 오면 알게 된다.

    <<이응노의 집, 이야기>> 개관도록 - <화가의 고향, 화가와 고향 - 이응노의 경우>
    김학량(동덕여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