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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來路이응노의 집

예술세계

이응노의 예술세계1:(도불 이전의 서화, 풍경화)

이응노는 전통 서화가로서 예술에 입문한 이후, 1958년 유럽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전통 사군자부터 현대의 추상까지 동서 미술의 핵심을 두루 섭렵했습니다. 그 특징에 따라 문인화 시기, 풍경화 시기, 반추상의 풍경 · 인물화 시기의 세 시기로 나눌수 있습니다.

  • 대나무그림에서 살아있는 대나무로

    열아홉 청년(1922년)이 된 이응노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먼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느 마을 서낭당의 단청이나 장의사의 상여 장식 그리 는 일이 상경길의 노잣돈이 되어 주었습니다. 왕실의 서화 스승을 했을 만큼 이름 높던 해 강 김규진을 찾아갔지요. 십수 차례 간청한 끝에 겨우 문하에 들기를 허락받고, 집안의 허 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밤중에나 그림 그릴 시간을 얻었습니다. 옛 교육 방식에 따라 스승의 그림을 똑같이 본뜨며 문인화법과 서예를 익혀 나갔습니다. 2년여의 노력 끝에 1924년 조 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을 했습니다. 스승은 호 ‘죽사(竹史)’를 선물할 만큼 제 자를 아꼈고, 고향의 아버지도 아들을 서화가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응노에게도 스승의 품을 떠나 홀로 서야 할 때가 왔습니다. 표구집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다 1926년에는 전주에 정착해 ‘개척사’라는 간판점을 운영하며 묵죽을 쳤습니다. 또 다른 호,‘고암(顧庵)’을 얻은 것도 이 무렵입니다. 몇 년이나 스승의 발치를 따라잡으려 그 리던 어느 날 비바람 휘몰아쳐 일렁이는 대숲 앞에서 크게 깨닫습니다. 화본 속의 대나무 그림이 아니라, 비로소 살아 있는 대나무를, 자신만의 대나무를 만난 것이지요. 청년 이응 노는 더 크고 새로운 물결로 나아가기를 마음먹습니다.

  • 관찰과 사생

    1935년, 일본 동경(東京, 도쿄)으로 떠난 이응노는 미술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사설 미술 교육원[가와바타 미술학교, 혼고 회화연구소]나 개인 화실[마츠바야시 케이게츠의 덴코 화숙]에서 서양화 와 일본화를 배웁니다. 일본에서는 일본의 고유한 남화(南畵)에 서양화의 방법을 섞어 고 안한 신남화(新南畵) 양식이 큰 유행이었습니다. 이응노도 서양의 스케치 풍에 동양화의 필묵 맛이 결합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실제 대상을 보고 느낀 것을 그리는 ‘사생(寫生)’이 그의 화본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일본과 조선, 도시와 고향으로 여행을 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붓으로 연필로 스케치를 했습니다. 때로는 먹과 파스텔도 가리지 않았습니다. 현 실에서 발견한 것을 부지런히 그림으로 기록하는 사이 30대의 이응노는 전통적 서화가에 서 현대적 동양화가로 변모해 갑니다.

  • 율동과 흥취

    젊은 이응노가 예민하게 느꼈던 변화의 바람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우리 화 단을 흔들었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향토주의’ 굴레를 벗어나서 전통 서화의 정신을 되찾 자는 움직임, 국제화에 맞춰 동양과 서양의 장점을 융합하자는 움직임, 제2차 세계 대전 이 후 유럽의 앵포르멜 경향에 도취되는 움직임 등이 나타납니다. 해방 공간의 혼란과 격변, 곧이은 전쟁의 상처 또한 이 땅 사람들이 딛고 일어서야 할 현실이었습니다. 이응노는 사생 을 유지하되 쾌활한 필묵을 결합한 양식으로 파괴된 도시와 재건의 현장을 포착합니다. 대 상을 그리면서도 흥취를 한껏 살려, 가난하고 어둠침침하던 시대에 보기 드물게 생명감 넘 치는 율동적인 그림을 개척합니다. 이응노의 집에서는 이 시기의 작품을 다수 선보입니다.

이응노의 예술세계 2 :(도불 이후 <구성>, <군상> 연작)

고암의 나이 쉰다섯. 화가로서 이미 일가를 이루고 안정된 삶을 꾸릴 수 있는 때에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세계의 화가들과 대결하고자’ 유럽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첫 1년, 독일을 순회하며 ‘반추상’ 그림을 선보여 호평 받고, 파리에 정착한 이후에는 추상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 시기 작품은<구성> 연작시기, 옥중작 시기, <군상> 시기로 나뉩니다.

  • 낯선 재료로 새로운 예술을

    1950년대에 한국의 미술가들이 미국과 유럽에 소개되기 시 작했습니다. 중년에 접어든 이응노였지만, 안주하지 않고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독일을 거쳐 1960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했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이응노는 폐지나 잡지를 종이죽처럼 짓이겨 붙이기도 했고[파피에 콜레], 수묵의 겹쳐지고 번지는 본연의 성질 을 표현[사의적 추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시도는 프랑스 화단에서 신선한 반응을 이끌어 냅 니다.

    이응노는 거의 모든 작품에 <구성>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선의 움직임, 먹의 번짐, 문 자의 형태와 여백의 관계 등 자신에게 추상 예술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어려서부터 익힌 서 예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응노는 동양의 필묵만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나무, 쇠, 타 일, 점토, 솜, 양털 등 모든 재료들을 다루었고, 유럽 화단은 이러한 실험을 주목합니다.

  • 억압된 몸, 한없는 열정

    1960년대는 유럽 전역에서 이념을 넘어선 자유를 향한 외침이 터 져 나오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두려워한 한국의 독재 정부에서는 이른바 ‘동백림 사건’을 조작합니다. 이응노 또한 이에 얽혀 교도소에 유배됩니다. ‘해외 국위 선양 예술인 초청 전시’를 개최해 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귀국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체포되어 무기 징 역을 선고받은 것입니다.

    억울하고 암울한 감옥 속에서도 이응노는 배움과 창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도소 생활이, 삶과 예술과 세계를 새로이 깨우치는 학교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비좁은 곳 에서도 간장이며 김칫국물을 젓가락으로 찍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밥과 폐지를 섞은 종이 죽으로 형상을 부지런히 빚었습니다. 출소 직후 치유를 하기 위해 고향 근처 수덕여관에 머 무르며 그린 너럭바위의 문자 추상 암각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리고 그 교도소에서 겪 은 세계와 사람들의 모습은, 이응노의 작업을 새로운 주제로 이끌어 갑니다.

  • 문자 추상의 세계를 열다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 이응노는 한자나 한글, 세계 곳곳의 여 러 고대 문자 형상을 재구성한 작품[서예적 추상]을 선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문자 추상’ 으로 알려진 이 양식은 이응노가 가장 어려서 접한 서예에서 출발한 것이었으며, 평생 추구 했던 동·서양의 결합이었습니다.

    이응노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다양한 재료들로 실험하면서도 서화, 수묵, 풍경, 인물, 사군 자 등 자신을 이끌고 깨우치게 했던 전통의 계승과 새로운 창작이라는 흐름을 놓치지 않았 습니다. 이응노는 한국에 돌아올 수 없었고 그의 활동을 한국에서 언급할 수도 없었던 시절 이었지만, 파리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고 푸른 눈의 제자들에게 한국의 서예와 수묵, 산 수를 가르쳤습니다. 자신이 한국 사람, 홍성 사람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 나의 그림은 평화

    말년에 이응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그리고, 만들고 새겼습니 다. 화폭 안의 사람들은 인종, 민족, 빈부, 최향, 남녀, 노소, 표정을 도무지 구별할 필요조 차 없는, 그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서 있거나 뛰고 걷거나 춤추고 행진합니다. 모여 큰 형상을 만들었다가, 화폭 밖으로 퍼집니다. 사람인가 했더니 잎이거나 획인 듯도 하고, 바 위에 새긴 고대의 형상인 듯, 추상 미술인 듯도 합니다. 그의 붓은 댓잎에서 시작하여 풍경 으로, 서체로, 추상으로, 그리고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긴 여정을 돌았습니다. 그가 이승에서 이룬 예술 세계의 대단원입니다.

    마침내 한국 땅에서도 이응노를 찾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89년 1월, 그가 애타게 그리던 고국에서의 전시회가 기획되었습니다. 고암은 혼신을 다해 화해와 용서의 만남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살아 국경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응노 는 유해로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파리 시립 페르 라 세즈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