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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來路홍성군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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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이응노 사진
홍성의 위인 이응노1904~1989
  • 고암(顧庵)·죽사(竹史)
  • 생애 1904~1989
화가, 회화, 조각, 태피스트리

이응노(李應魯, 1904~1989)는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고암(顧庵)·죽사(竹史)입니다. 1904년 음력 1월12일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의 엄격한 선비 집안에서 부친 이근상과 모친 김해 김씨의 5남1여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서당 훈장이었던 부친 밑에서 한자를 익히다가 홍성의 보통 학교에 입학했지만, 일본식 신식 교육을 거부 했던 집안의 뜻에 따라 2년만에 학교를 중퇴했습니다. 고암은 이즈음 용봉산과 덕숭산 수덕사 부근을 사생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김규진(金圭鎭) 문하에서 동양화를 배웠고, 일본에서는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柱月(송림주월)]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1924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대죽», «청죽», «풍죽» 등이 입선·특선하였고, 광복 뒤에는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과 대한미술협회를 통해 재야작가로서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홍익대학교·서라벌예술대학 교수를 지냈습니다. 이때 작품으로 «노우(怒牛)», «새», «숲», «봄», «비원(秘苑)» 등이 있는데, 서민상·풍경·전쟁체험 등을 작품화한 것입니다.

1958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 정착하여 동양미술연구소를 개설하고 동양화를 지도하는 한편, 파케티화랑을 통해 이루어진 작품활동은 1960년대 후반까지 콜라주기법과 자유로운 수묵담채 형상의 작업을 추구하고, 이후 10년 동안 문자추상(한글·한자의 서예적 추상)의 작업을 시도하였습니다. 1965년에는 제8회상파울루비엔날레전에서 명예대상을 받았습니다.

한편 1967년 동베를린사건에 연관되어 소환, 투옥되었고, 1977년 백건우(白建宇)·윤정희(尹靜姬) 부부의 북한납치미수사건에 관계된 것으로 밝혀져 한 때 국내미술계와 단절되기도 하였습니다. 1980년대에는 종래의 추상형식에서 구상적 표현으로 돌아가 «인물군중상» 연작을 시도, 긴박한 움직임이 있는 화면을 통한 의중(義衆)의 시각적 발언을 시도하였습니다. 파리 정착 이후 작품은 대부분 제목이 없이 발표되었으며, 1983년 프랑스에 귀화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