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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의역사

선사시대

형성

홍성지역에 인류가 언제부터 살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해발 40 ~ 60m 내외의 낮은 구릉과 하천, 바다가 어우러진 자연환경에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 조각과 청동기 시대 고인돌이 곳곳에 분포하고 있어, 홍성지역에 이른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구석기시대

아직 발견된바 없음

신석기시대

아직 발견된바 없음

청동기시대

유적

구항면 태봉리 일대 구릉지에서 지석묘 발견, 비교적 많이 분포

돌칼, 석기류들이 출토된 지역

은하에서 결성을 통하여 서해 바다로 이어지는 학산천과 관련된 지역으로 은하면의 학산리와 대천리가 있고, 바다와 인접한 곳으로서 은하면의 장척리 지역이 있다.

금마천과 관련된 지역

홍동면의 팔괘리, 문당리, 구정리 등이 있다.

팔괘리 출토유물

대체로 B.C 4~3세기의 것으로 알려짐

무늬없는 토기의 파편들이 수습된 지역

  • 갈산면 부기리, 결성면 금곡리, 은하면 학산리, 홍동면 팔괘리 등
  • 하천과 바다가 인접하여 낮은 구릉이 펼쳐진 지역으로 청동시대의 석기류가 출토된 지역과 중복

대표적인 무덤양식

  • 고인돌 : 대체로 토기나 석기가 출토된 지역에서 발견됨
  • 남방식 고인돌 : 홍성지역의 고인돌, 거의 전지역에서 발견됨
  • 북방식 고인돌 : 대부분 서부지역, 바다와 인접한 은하면, 구항면 등에 분포

삼한시대

삼한시대 이미지

형성

B.C 3~2세기에는 철기보급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지고 점차 지역단위의 정치체제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형성됨

배경

B.C 1세기 전후에 한강유역으로 남하한 부여계 온조집단의 이주는 새로운 형태의 결속기반을 형성시킴으로서 마한 연맹체의 세력을 더욱 위축시켰고, 홍성지역의 소국이 마한 연맹체에서 점차 백제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체제안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초래

위치

마한의 영역에 위치

마한

54개의 소국이 있었는데 역사학자들의 이제까지 연구결과를 정리하면 홍성 지역에는 하나 이상 최대 4개의 소국이 있었던것으로 비정되고 있음. 예컨대 현재의 홍성군 일대에는 감해비리국(이병도), 소위건국(정인보), 점비리국(천관우), 사로국(이병도) 등이 있었으며 향토사가중에는 월산에 마한의 최대강국 월지국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음

백제시대

백제시대 이미지

형성

백제의 중앙세력권안으로 포함된 시기는 근초고왕이 마한 연맹체의 전지역을 장악하는 시기와 일치할 것으로 짐작됨

유적

결성면 성호리에서 발굴된 백제고분군 -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다음 한층 더 정비된 지방통치를 받았던 것으로 봄. 이는 백제 중앙문화의 수용이 폭넓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은 결성지역이 전국 주요지역에 왕족을 파견하여 다스렸던 22담로중 한 곳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

삼국사기 지리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후 방-군-성 체제에 입각한 지방체제가 갖추어졌을 때 홍성지역은 북방-결기군-웅진성에 속해 있었으며 장곡면 지역은 결기군 산하의 사시량현, 갈산면 지역은 마시산군의 영현인 우견현이 있었다.

백제 멸망 후

각지에서 백제의 부흥기치를 내걸고, 임존성(지금의 홍성군 금마면과 예산군 대흥면의 군계를 이루는 봉수산)과 주류성(서천 비인설, 연기설, 부안설이 있으나 홍성설이 유력)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전개, 부흥군은 한때 20여성의 호응을 받았으나 전세가 점차 약화되어 662년 12월 주류성이 함락되어 부흥군은 피성(피성 역시 여러 설이 있으나 홍성군 장곡면의 석성산성을 주류성으로 보았을때 당진군 일대로 추정)으로 거점을 옮기게 되었다.

수세에 몰린 부흥군은 663년 2월 피성으로, 다시 주류성으로 옮겨 전열을 정비하였으나 지도층에 내분이 생겨 663년 6월 복신이 풍왕에게 살해됨

결말

나.당 연합군은 같은 해 8월부터 부흥군 토벌에 주력하여 두릉윤성과 주류성 등 여러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부흥군의 최후 거점인 임존성도 663년 11월에 함락-홍성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백제부흥의 노력은 막을 내림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 이미지

형성

백제 멸망 후 홍성지역은 당의 세력권에 들어감

배경

당 고종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동명. 지심. 노산. 고사. 사반. 대방. 분차 등의 7개주를 두었으며 52현을 두었다. 이때 홍성지역은 대략 지심주에 속하였을 것으로 추정.

670년을 전후로 당군을 축출한 신라는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여 9주 5소경제로 정비, 9주는 옛 삼국지역에 각각 3개씩 설치하였는데 백제지역에는 웅천주(웅천주 -> 웅주, 공주), 완산주(전주), 무진주(광주)가 설치되었고 홍성지역은 웅천주에 속하게 되었다.

웅주 관내에는 13개군과 29개현이 있었는데 이 때 홍성지역은 결성군(백제의 결기군, 지금의 결성면)과 그 영현이었던 신량현(백제의 사시량현, 지금의 장곡면 일대), 그리고 이산군(백제의 마시산군, 지금의 예산. 덕산 일대)의 영현이었던 목우현(백제의 우견현, 지금의 갈산면과 서산시 고북면 일대)이 있었다.

한편 명산대천에 국가의 제사를 지낸 3산 5악의 하나로 오서산이 있어 주목된다.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조에 의하면 "천자는 천.지와 천하의 명산대천을 제사하되, 제후는 사직과 자기 영지내에 있는 명산대천만을 제사한다...3산 5악이하 명산대천을 나누어 대·중·소사로 한다...중사5악...오서악(결기군, 지금의 오서산)..."이라 기록하고 있어 오서산이 명산대천의 제사 지역 가운데 하나였음을 밝히고 있어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헌덕왕 14년(823년) 웅주의 도독이었던 김헌창이 난을 일으켜 연호를 "경운", 국호를 "장안국"이라 했을 때, 홍성지역은 웅주 관내에서 잠시 장안국의 영역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후삼국시대

후삼국시대 이미지

배경

통일신라 말 처음으로 운주(지금의 홍성일대)라는 지명이 사료상에 나타남과 더불어, 고려건국 이후 운주에서 왕건과 싸워 패한 긍준의 세력과 왕건의 후비 홍복원부인 홍씨의 아버지인 홍규의 존재는 나말여초 홍성지역에 독자적 세력을 형성한 호족이 대두하고 있었음을 시사(공주대학교 박물관장 윤용혁 교수-긍준과 홍규는 동일인물로 추정)

홍성지역-후백제시대의 초기의 배경:후백제의 영역 안에 포함되어 견훤과 궁예의 치열한 세력경쟁속에서 점이지대에 위치하여 대립과 연합을 반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궁예가 군사력을 강화시켜 남하하자 웅주를 지키던 후백제의 장군 홍기는 자진하여 투항하였고(904년), 이는 주변지역에 영향을 미쳐 홍성지역도 후고구려와 연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궁예가 왕건에게 축출되고 후고구려의 영향력이 소원해진 틈을 타 홍성지역을 비롯한 주변의 10여주.현은 고려와의 관계를 청산하고(917년), 후백제와의 연합을 도모하였다(고려사, 태조 원년 8월).

그 결과 홍성은 934년까지 약 17년 동안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다.

예컨대 고려의 대상 홍유(남양홍씨의 시조)에 의해 유민 500여호가 모집되고(고려사, 태조 2년 8월), 임존성이 공략되어 3,000여명이 죽었으며(고려사, 태조 8년 10월), 927년 운주가 공략되어 성주 긍준이 격파되었다(고려사, 태조 10년 3월).

결국 홍성지역은 태조의 운주 정벌군과 견훤의 5천 군사가 운주에서 격돌하면서 견훤군 3천여명이 격파된 후 웅진이북 30여성의 항복을 받아냈다(934년).

고려시대

고려시대 이미지

형성

고려 왕건은 934년 운주(지금의 홍성)전투에서 승리를 계기로 충청남도 서북부지역을 장악하고, 여세를 몰아 936년 경북 선산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후삼국 통일

배경

태조는 호족 통합정책의 일환으로 정략적인 혼인정책을 실시.

이때 12번째 후비 홍복원부인 홍씨는 홍주사람으로 삼중대광 홍규의 딸이었다.

홍씨는 태조와의 사이에서 왕자 직과 공주 일후를 낳았다(고려사, 권38ㅡ 열전1) -> 후삼국 이전까지는 사료상에 전혀 나타나지 않던 지금의 홍성읍을 중심으로 한 운주라는 지역이 후삼국시대를 거치면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급부상하였음을 시사. 아울러 홍성지역의 위상을 높이는데 영향을 준 듯하다.

지방통치제도가 정비되면서 홍성지역에는 성종 14년(995년) 운주에 도단련사를 파견한 이래, 현종 3년(1012년)에는 도단련사를 폐지하고 지주사를 두었으며, 그 뒤 운주를 홍주로 개칭한 뒤 양광도에 배속시키면서 3군 11현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고려사] 3군

혜성군(당진 면천일대), 결성군(홍성 결성일대), 대흥군(예산 대흥일대)

11현

홍양현(보령 천북일대), 홍성현(홍성읍일대), 이산현(예산 덕상일대), 여미현(서산 해미일대), 정해현(서산 고북과 해미일대), 고구현(홍성 갈산과 서산 고북일대), 보령현(보령일대), 여양현(홍성 장곡일대), 신평현(당진 신평일대), 당진현(당진읍일대)

1358년(공민왕7) 왕사(王師) 보우(普愚;1301~1382)의 고향이라 하여 목으로 승격되고, 1368년 지주사로 되었다가 1371년 다시 목이 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이미지

형성

홍성지역은 태종 13년(1413년)에 실시된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홍주목과 결성현이 두어졌고 홍주목에서는 16개 군현을 관할했다.

영군(3개군)

태안, 서산, 면천

영현(8개현)

해미, 당진, 덕산, 예산, 홍성, 결성, 보령, 대흥

속현(5개현)

신평, 여양, 고구, 홍양, 합덕

배경

홍주목 관내에는 2개의 역(세천역, 용곡역)과 3개의 원(여양원, 인후원, 홍천원)이 있었다[세종실록지리지].

한편 세조때 진관체제로 지방행정체제가 개편되면서 5군 14현을 관할-지금의 경기도 평택이남으로부터 충남 서천에 이르기까지 차령산맥의 서북쪽을 관할하는 행정과 군사의 요충지로써 기능을 하게 된다.

중종25년(1530년)에 홍주부로 승격되어 관찰사가 파견되기도 하였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현종때에는 잠시 홍양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승격되었으며(문헌비고, 대동지지) 양난 이후 홍주목(영조~헌종)은 27개면을 관할하였다[충청도읍지].

한편 결성현은 태종 13년에 현감이 배치되면서 오늘날 결성면.광천읍.은하면.구항면 등을 관할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

양난 이후 결성현은 영조 9년(1733년) 현내에서 아비를 죽인 죄인이 있었던 관계로 잠시 보령현에 예속시켰다가 영조 12년에 복구됨. 조선후기 결성현은 10개면을 관할. 1895년 갑오.을미개혁이 추진되면서 지방제도가 23부제로 개편됨에 따라 홍주부로 승격되어 인근 22개군을 관할하다가 1896년에 실시된 13도제에 의해 홍주군으로 개편됨

그 이후

그이후 시대 이미지

연혁

  • 1914년 : 홍성군(홍주군과 결성군 통합)
  • 1941년 : 홍주면 홍성읍으로 승격
  • 1942년 : 광천면 광천읍으로 승격

형성

만해 한용운, 백야 김좌진, 홍주의병등 홍주의 반일 분위기를 잠재우고, 같은 충남지역에 위치한 [공주]와 일본어의 발음구별이 어려워 행정적 불편을 피하기 위해 1914년에 군.면의 통폐합령에 따라 일제에 의하여 홍성으로 개칭